[뉴스레터]ep.04 주 72시간의 슬픔과 기쁨

2025-01-23


2025년 1월의 편지


워라밸이 그리 나쁘지 않은 회사를 다녔습니다. 회의와 외근이 많은 편이고 가끔 야근을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 주는 직장이었어요. 일을 하다가 카톡확인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때맞춰 식사를 했어요. 그 후엔 동료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티타임을 가지는 것도 일상이었죠. 연차를 내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요.


당연한 얘길 뭐 이렇게 길게 하느냐고요?

요즘 저는 그렇지 못하거든요.


저녁이 있는 삶은 멀어진 지 오래고 끼니를 거르거나 대충 때우는 날이 많아요. 지인들의 안부 연락도 놓치기 일쑤입니다. 좋아하는 운동은 거의 가지 못하고요, 노동으로 점철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쉬는 날로 정한 일주일에 하루조차 밀린 서류 작업을 하느라고 바빠요.

편지를 쓰며 가늠해 보니 (통근과 식사시간, 서류 작업 등을 제외한) 순수한 업무시간이 주 72시간을 훌쩍 넘었더라고요. 업무의 많은 부분이 무거운 원목들을 들어 옮기고, 자르고, 가공하는 육체노동임을 감안하면 워라밸이 와장창창 붕괴된 회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제는 제 고용주이자 대표가 바로 저라는 점입니다. 저를 이렇게 혹사시키며 쉬지 못하게 하는 주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예요.


이렇게 바삐 일하는 게 된 것은 12월부터입니다. 전엔 주문이 없어서 걱정으로 하루를 채우던 날도 적지 않았거든요. 연말에 '서울리빙디자인페어'와 '궁디팡팡 캣페스타'를 통한 주문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어요. 


인어피스는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수제작하는 원목가구제작은 굉장히 노동집약적인 품목입니다. 제가 쉬거나 자는 사이에는 작업에 어떠한 진전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이 꽤나 원망스러울 정도로요. 결국 저는 더 일하고 덜 쉬는 것을 당분간의 기조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도하고 있어요. 이런 불경기에 주문이 많아서 힘들 수 있다는 사실, 인어피스의 제품을 기다리는 고객님들이 있다는 사실에 말이에요. 안도감과 동시에 두려움과 위기감도 느껴요. 육체노동 시간이 길어지면서 몸의 회복능력 저하되고 있다는 사실, 몸의 피로가 누적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기쁨이 아스라해진다는 사실에요.


찌든 채로 저녁에 먹는 첫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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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어피스에 0.5를 담당하며(ep.02의 '1인 브랜드의 한계선에 부딪히며' 참조) 시간제로 근무하는 프리워커 H님, W님과 식사했습니다. 음식을 기다리며 제가 말했어요.

 

 - 요즘 저, 별로 안행복한 것 같아요.

제 입에서 출력된 말이 제 귀로 다시 입력되며 피로가 더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러자 H님이 말씀하셨어요.

 - 좀 쉬세요. 그런데 소연님. 저는요, 인어피스에서 일할 때 되게 행복해요. 편안하고.

W님도 말씀을 보태셨어요.

 - 저도요. 인어피스에서 일하는 시간이 요즘 제 일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에요.


뭔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두 분이라도 행복하시다면 다행이라고 답하고 말았는데요. 실은 몸속의 피로물질이 사르륵 녹는 기분이었어요. 함께하는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회사를 만들어가는 중이라면- 이 두려움과 위기감을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제 안에 그런 담대함이 있을 거라고 믿어 봅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인어피스라는 회사와 동명의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요. 가구 많이 팔아서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은 아니었어요.


사람/동물/자연을 생각하며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 그 브랜드를 즐겁게 키워가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 그 회사를 통해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커뮤니티. 그 모든 것을 기대하며 시작한 일입니다. 그 일환으로 너무 멀지 않은 날, H님과 W님 같은 멋진 분들을 많이많이 모실 수 있는 멋진 회사가 되고 싶어요.




그러자면 앞으로도 스스로에게 악덕 고용주인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아차차, 하며 정신을 차렸어요. 멋진 브랜드, 회사,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은 꽤 길고 어려운 도전이 될 텐데, 그때까지 제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전 야근할 건데 바쁘시면 먼저들 퇴근하세요." 하는 진상밉상 대표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아, 생각만 해도 별로네요). 그게 어느 날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닐 것 같아요. 그 또한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일이죠.


앞으로 일주일에 하루는 푹 쉬고, 때맞춰 식사도 챙겨 먹고, 가끔은 영감을 찾아 긴 외출을 하기도 하면서 지내야겠어요. 구독자님도 건강히 잘 지내시다가 새로운 달에 다시 만나요.



2025년 1월 

제 안에 악덕 고용주를 무찌르며,

인어피스 박소연 드림.